왕의 비명 "죽은 며느리 탓에 귀에서 홍수가 났다"
왕의 비명 "죽은 며느리 탓에 귀에서 홍수가 났다"
인조의 이명 ②
귀에서 큰물이 흐르는 고통을 너희가 아는가?
1646년(인조 24년),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바로 그 해 겨울부터 이명 증상이 시작되었다. 겨울의 초입인 음력 10월 17일, 인조는 이명 증상을 호소한다. 실록이 전하는 인조의 증상은 한의원을 찾는 수많은 이명 환자의 그것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인조의 하소연을 직접 들어보자.
"전에부터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났었다. 그런데 금월 13일, 왼쪽 귀에서 홀연 종치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는 가는 소리가 아니라 큰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다. 어제 아침에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침을 맞으면 좀 낫지 않겠는가?"
영의정 김자점을 비롯한 신하와 어의들은 먼저 귀 감기로 진단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귀가 찬 기울을 만나 감기가 들었고, 그 결과 이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감기약으로 땀을 내면 체력이 떨어져서 증상이 심해질 수도 있다며, 귀에 뜸을 떠서 온기를 더해서 이명의 치료를 돕겠다고 처방한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인조의 이명 증상은 잡히지 않았다. 인조는 "귀에 뜸을 뜨고 나서도 밤에 열이 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4~5일 전부터는 종을 치는 듯한 큰소리가 귀에서 나서 심신이 현란할 정도가 되었다"고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다. "왼쪽 귀의 압력이 달라서 불쾌한 느낌이 오른쪽으로도 퍼졌다"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여전히 이명의 원인을 감기라고 확신한 어의들은 다시 의논해 감기약(인삼패독산)을 세 첩 처방했다. 그러나 인조가 이 약을 복용하고 나서도, 감기 증세는 나았지만 이명 증상은 변화가 없었다. 결국 당대의 명의로 명성이 자자했던 유후성이 이명 증상만 치료할 처방을 내세우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나섰다.
유후성이 다른 어의와 함께 처방한 약물은 '소시호탕'에 '사물탕'을 합방한 처방이었다. 감기 끝의 열을 없애고, 귓속의 염증을 없애면 이명이 없어지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왕의 이명은 차도가 없었다. 나중에는 <동의보감>에서 막힌 귀를 열어주고 기를 통하게 하는 약으로 규정한 '투관통기약'의 하나인 '투이통'도 처방했다.
<동의보감>은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거나 바람 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종소리가 날 때" "천초의 검은 씨앗, 석창포, 파두, 송진 등을 가루를 내어 황랍과 섞어 붓대 모양으로 만든 다음 솜에 싸서 귓속에 넣으면" 효험이 있다고 전했다. 인조도 여러 약물을 대추씨 만하게 반죽해 알약을 만들어 솜에 싸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유후성을 비롯한 어의는 곧 이런 투이통 처방이 외이도에 상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로 중지할 것을 건의한다. 이 약 저 약으로도 이명이 잡히지 않자, 어의들은 11월 1일이 되어서야 드디어 애초 인조가 바랐던 침으로 다스릴 방법이 검토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바로 인조가 가장 총애했던 의관 이형익이 등장한다.
이형익은 정식 의관은 아니었지만 사기(邪氣)를 다스린다고 특별히 임시 채용된 의관이었다. 사기는 바로 저주와 같은 요사스럽고 나쁜 기운이고, 이형익은 바로 이런 사기가 초래한 질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요즘으로 따지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일종의 '퇴마사'인데, 어처구니없게도 인조가 가장 신뢰했던 의사가 바로 이형익이었다.
이형익은 충청도 대흥 지역 출신으로 인조 11년 내의원의 천거로 임시 채용됐다. 사이비 퇴마사를 사관들이 곱게 볼 리가 없다. "대흥 땅에 이형익이란 자가 있는데 침법을 약간 알아 사기를 다스린다고 세상 사람을 현혹했다" 홍문관은 나름의 검증 결과까지 열거하며 그의 진료를 비난했다.
"오래전부터 괴이한 방법과 신통한 비결을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지만, 사대부 중에 그의 침술로 효험을 본 사람이 없고 오히려 더러 해가 따랐다."
하지만 인조는 이런 이형익을 어떤 의사보다도 신뢰했다. 그렇다면, 이형익의 이명 치료는 어땠을까? 그는 인조의 질환을 저주나 귀신이 일으킨 사기의 질환으로 보았다. 그래서 나쁜 기운을 억누를 수 있는 붉은 양기를 가진 뜨겁게 달궈진 침을 열 곳에 놓자고 인조에게 처방했다.
놀란 어의들이 너무 많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아홉 곳의 혈을 찌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이형익이 침을 놓는 것과 동시에 약 처방도 변했다. '자신통이탕', '당귀용회환' 등의 약이 새롭게 처방되었다. 자신통이탕은 한의학에서 생명력의 원천으로 보는 명문의 기능을 보하는 것이고, 당귀용회환은 화병으로 귀가 안 들리는 증상을 치료하는 약이다.
귀는 안다, 마음의 병을!
이렇게 여러 처방을 구사하였지만 인조는 죽을 때까지 이명으로 고생하면서 침과 약으로 연명하였다. 인조와 비슷한 이명 증상을 호소하는 중증 환자를 여럿 치료한 한의사로서 이런 실록의 기록은 여러 가지 고민을 던진다. 왜 인조의 이명에는 한방 치료가 효험이 없었을까?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한 가지 답변의 단초를 제공한다.
"왕이 되고 나서도 인조는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측근에 모시던 궁녀들도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 표현이 적으니 신하들은 왕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추측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게다가 글을 아주 잘 지었으나, 어떤 글도 잘 쓰지 않았고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비답(批答)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여 자신의 필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이런 기록을 염두에 두면, 인조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는 성향이었다. 나는 인조의 이런 성향이 그를 괴롭힌 이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특히 인조와 같은 심한 이명의 경우에는 글머리에 언급한 대로 마음의 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평소 자신의 숨소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일정하기 때문이다. 귀 역시 마찬가지다. 귀도 끊임없이 울린다. 하지만 그 울림이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청신경은 그런 울림에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는다. 이런 균형이 깨질 때, 우리를 덮치는 것이 바로 이명이다.
그런 균형을 깨는 중요한 원인이 바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고통의 소리다. 인조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의 중심에 섬으로써 끊임없는 번민에 시달렸다. 그런 권력을 지키고자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죽음으로 내몰면서 이런 번민은 더욱더 깊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고통을 결코 밖으로 표출하는 대신에 자기만의 가면을 썼다.
인조의 이명은 자신이 만든 깊은 수렁이었던 것이다. 이 수렁을 어떤 명의가 메울 수 있을 것인가? 오늘도 이명으로 한의원을 찾는 환자를 맞는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