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學/낮은 한의학

자타공인 '밤의 황제', 성종은 왜 色에 집착했나?

蓮義郞 2014. 2. 16. 17:34

물에 밥을 말아 먹는 성종의 습관은 설사로 이어졌다. <단계심법>이란 책은 이렇게 지적한다.

"여름철에 찬 음식을 많이 먹거나 찬물이나 얼음물을 너무 자주 마셔서 토하거나 설사한다. 더위 먹은 데는 비위를 따뜻하게 하며 음식물을 잘 소화시키고 습(濕)을 없애며 오줌이 잘 나가게 해야 한다."

<위생가(衛生歌)>라는 양생법 책도 "사철 중에 여름철이 조섭하기 힘들다. 잠복한 음기 속에 설사하기 아주 쉽다"라고 적었다.

이런 지적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대가는 심한 설사로 나타났다. 성종 15년, 20년, 25년 여러 번 설사와 이질을 호소하는데 특히 25년 8월 22일엔 사형수의 처형과 관련한 조계(중신과 시종신이 편전에서 벼슬아치의 죄를 논하고 단죄하기를 임금에게 아뢰던 일)를 중단할 정도였다.

"지난밤과 오늘 아침에 뒷간에 여러 번 다녔기에 조계를 정지한다."

11월 20일엔 경연을 정지하면서 세자가 "주상께서 측간을 너무 자주 가셔서 피로해 계십니다"라며 우려한다. 성종이 재위 25년 심한 설사와 이질 직후 세상을 떠났다는 건 건강의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서증을 앓는 사람에게 주는 양생 지침을 동의보감은 이렇게 적고 있다.

"여름은 사람의 정신을 소모하는 시기다. 심장의 기운 심화는 왕성하고 신장의 기운 신수는 약해져 있다. 그러므로 성생활을 적게 하고 정기를 굳건하게 해야 한다."

또 다른 문장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여름은 더위가 기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술을 마시거나 성생활을 하면 신이 상하여 죽을 수 있다."

▲ 드라마 <인수대비>의 성종

왕후 3명, 후궁 9명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사랑하는 연인의 애처로운 이별가인 듯하지만 성종이 아끼던 신하 유호인(兪好仁)을 떠나보내며 지은 시다. 얼마나 다정다감한 심성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멋쟁이가 왕이란 지존의 신분이 됐으니 여성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까.

성종은 자타가 공인하는 '밤의 황제'였다. 오죽하면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란 별명이 붙었을까. 낮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였던 요순 임금처럼 정사를 돌봤고, 밤엔 중국 하나라의 걸 임금과 은나라의 주 임금처럼 주색잡기에 능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이런 별칭에 걸맞게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 등 큰 업적을 남긴 반면, 거의 매일 밤 곡연(임금이 궁중 금원(禁苑)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베풀던 소연)을 베풀고 기생들과 어울렸고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25년의 재위 기간에 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을 맞아들였고 16남 12녀를 거느렸다. 자식이 너무 많아 궁궐에서 다 기를 수 없게 되자 궐 밖 여염집에 살게 할 정도였다.

야사(野史)의 기록을 다 신뢰할 순 없지만 차천로가 지은 <오산설림초고>엔 성종과 관련한 기생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함경도 영흥의 명기로 '봄바람에 웃는다'라는 이름의 소춘풍(笑春風)이 성종의 부름을 받았다. 연회도 없이 조용하기만 한 궁중의 별전에서 성종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춘풍에게 술잔을 건네며 "오늘 밤은 너와 함께하고 싶은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성은을 받으면 평생 다른 사람과 정을 나눌 수 없기에 독수공방이 싫었던 그녀가 거절의 뜻을 비치자 성종은 웃으면서 술과 시로 밤을 새웠다. 그의 풍류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다.

과도한 음주와 성생활

성종의 첫 번째 왕후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 씨였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두 번째로 숙의 윤 씨를 왕후로 맞았다. 윤 씨는 연산군의 어머니다. 성종은 궐 밖에서 형 월산대군과 어울리고 호색 기질을 계속 발휘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소용과 엄숙의 등 후궁을 가까이했다. 질투심에 불탄 윤 씨는 비상(砒霜)이 든 주머니와 책으로 방양이라는 저주 의식을 치르다 발각된다. 이후 잠잠해졌지만 중궁위(中宮位) 생일인 재위 10년 6월 1일 저녁,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다.

"지금 중궁(왕비를 높여 이르던 말)의 행실은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간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예전에 중궁의 실덕이 심히 커서 일찍이 이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경들이 모두 다 불가하다고 말하였고 나도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고치지 아니하고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왕비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자신의 생일날 하례도 없이 옷 한 벌로 때우면서 다른 시첩의 방을 찾았으니 분통이 터지지 않았겠는가. 결국 폐비가 되어 쫓겨난 후 사약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연산군을 역사상 가장 타락한 왕으로 만든 폐비 윤 씨 사건이다.

체질적으로 신장이 약한 성종이 자신의 건강을 해치려고 성생활로 마음껏 역주행한 셈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술도 왕의 건강을 해쳤다. 공식적으로도 명나라와 일본의 사신들과 연회를 자주 벌였는데 회례연이 18회, 양로연이 21차례, 진연이 50차례로 술 마실 기회가 너무 많았다. 서병에 가장 해롭다고 경고한 음주와 성생활이 과도했다는 점은 반드시 짚어야 할 해악이었다.

동의보감은 정기(精氣)를 이렇게 정의한다.

"대체로 정(精)은 쌀 미(米) 자와 푸를 청(靑) 자를 합해서 만든 것으로 아주 좋다는 말이다. 사람한테 정은 아주 귀중하면서도 매우 적다. 사람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목숨이며 아껴야 할 것은 몸이고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은 정(精)이다."

중국 고대 한의서 <난경(難經)>은 "심장엔 정이 3홉 있고 비장엔 흩어진 정기가 반 근 있으며 담에는 정이 3홉 들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양생서는 "사람 몸에 정이 통틀어 1되 6홉 있다. 16세 남자가 정액을 내보내기 전엔 1되다. 정이 쌓여 그득 차면 3되가 되며 자꾸 내보내서 적으면 1되도 못된다"고 했다.

재미있는 구절도 있다.

"사람이 성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정이 혈액 속에서 풀려 있어 형체가 없다. 그러나 성생활을 하게 되면 성욕이 몹시 동하여 정액으로 되어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쏟아낸 정액을 그릇에 담아 소금과 술을 조금 넣고 저어서 하룻밤을 밖에 두면 다시 피가 된다."

사실 보신(補身)과 보신(補腎)의 개념은 비슷하게 쓰였다. 보신은 몸을 보한다는 일반적인 뜻이지만 보신은 간, 심, 비, 폐, 신 중 하나인 콩팥을 보한다는 뜻으로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신장은 '생명의 정을 간직하는 부위로 정신과 원기가 생겨나는 곳'이며 '남자는 정액을 간직하고 여자는 포(胞), 즉 자궁이 매달린 곳'이라고 <난경>에선 풀이했다. 신장이 생명 활동을 영위케 하고 성행위와 생식 활동을 주관한다는 것은 보신(補身)의 핵심이 보신(補腎)이라는 말과 잘 통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맞다.

성종을 고통스럽게 한 또 하나의 질병은 치통이었다. 재위 11년 7월 8일 치통으로 고통받던 성종은 승정원에 하교해 중국 사신에게 치통을 그치게 하는 약을 물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운을 띄운다. 그러자 김계창은 단박에 "전하의 병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알게 할 수는 없다"고 거절한다.

7월 21일 우여곡절 끝에 사신들을 경회루에 불러 잔치를 벌이는데, 사신들이 술잔을 권하자 성종은 "사신들이 가르쳐준 곡소산을 먹고 치통이 좋아졌는데 술을 먹으면 심해질까 두렵다"고 사양한다. 사신들은 다른 처방이 있다며 안심시키고 술잔을 비우게 한다. 곡소산은 <동의보감>에 기재된 곡래소거산의 준말이다. 웅황, 유향, 후추, 사향, 필발, 양강, 세신 등이 들어간 약물로 약을 가루 낸 뒤 콧구멍에 불어넣어 치료한다.

성종이 앓은 치통은 그의 약점인 신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의보감>에서 치아는 뼈의 끝인데 이는 신장이 주관한다. <황제내경>은 신장이 쇠약하면 치아 사이가 벌어지고, 정기가 왕성하면 이가 든든하며, 허열(虛熱)이 있으면 이가 흔들린다며 신장의 허열이 병의 뿌리임을 강조했다.